1969년 7월 25일 미국 닉슨 대통령의 Guam Doctrine은 북한과 날카롭게 대치하고 있던 한국에는 비상사태나 다름이 없는 선언 이였다. 미국은 우방을 지원은 하겠지만 모든 자유국가의 안보를 떠 맞지는 않을 것이라는 선언이었다. 미국이 핵우산은 제공하지만 자국의 안보는 자국이 지키라는 선언 이었다. 아시아의 문제는 아시안의 손에 맡긴다는 선언으로 미국이 비엩남 전쟁에서 손을 떼겠다는 묵시적인 폭탄 선언 이었다.한국 안보에 비상을 알리는 위기의 신호였다
1973년 미국은 파리에서 공산월맹과 다음과 같은 비밀평화협정을 체결한다.
1) 남비에트남과 북비에트남은 1973년 1/27에 휴전을 한다
2) 비에트남전 미군포로를 석방하며 60일 이내 미군은 철수한다
3) 비에트남은 자신들의 문제는 자신들이 책임진다.
4) 남북비에트남은 평화적으로 단계적인 통일을 한다
파리협정에 따라서 1973년 미군은 월남전으로부터 완전 철수했다. 미국은 공산월맹과의 평화협정에서 완전히 속았다. 평화협정 내용대로 하면 남북 비에트남은 전쟁을 종식하고 상호 평화적인 방법으로 합의에 의해 단계적인 통일을 지향했어야 한다, 그런데 미군이 철수하자 공산월맹은 미국의 눈치를 보면서 휴전협정을 깨고 공격을 다시 시작했다. 미군이 철수한 후 극심한 부패와 분열, 오랜 비에트콩의 게릴라 공격으로 지친 월남 정부는 문자 그대로 난장판 이였다 . 민주화를 앞세워 학교 ,종교계 및 각 계 각 층에 잠복한 공산세력과 반정부세력은 합세하여 데모와 폭동으로 월남의 운명은 문자 그대로 풍전 등화였다.
명석한 박정희대통령의 안보감각에 비상등이 켜졌다.1949년 미국의 오판으로 한국에서 미군 철수를 한 직후 단군 이래 가장 비참한 참극을 불러온 북한의 무력 남침을 직접 경험한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이 다시 한반도에서 철수 할 것이라고 거의 확신을 하고 그렇게 되면 한반도는 또 다시 민족 상쟁의 참사가 일어날 것이라고 믿고 중대 결심을 한다. 국내 정세는 경제 발전에 따른 어두운 그림자로 국민들의 욕구 불만과 반정부세력과 친북세력들의 합세로 연일 계속되는 데모로 혼돈스러웠고 1971년 2월 미군의 주력 부대인 7사단 병력 20000명이 한국에서 철수한다. 다급해진 박정희대통령은 당시 정보부장 이후락을 북한에 보내 김일성에게 상호 오판에 의한 불장난은 하지 말자고 제안하여 1972년 7월4일 남북 7.4 공동 성명을 이끌어낸다. 일단은 북한의 오판을 막은 것이다.
국가비상 체제를 만들지 않으면 북한의 오판으로 한국이 위태로운 것은 물론 다시 민족 대참사가 난다는 것을 직감하고 마침내 1972년 10월 17일 유신체제를 선포하고 국민투표에 붙여 투표율 92.9% 찬성 91.5%의 압도적인 지지로 유신체제를 선포하고 국가안보를 강화하는 비상조치를 취했던 것이다.미군이 철수한 월남은 공산화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 박정희대통령의 판단은 적중했다. 미국이 다시는 월남전에 계입 할 뜻이 없다는 뜻을 암암리에 확인한 공산월맹은 마침내 월남 전역에 총공격 명령을 내린다. 1975년 4월 30일 미군이 철수한 월남은 극심한 내분과 월맹이 숨겨놓은 공산당원들의 총공세로 인하여 공산 월맹에 항복을 한다, 북한의 김일성도 즉시 중국을 방문하여 기회가 온 것이 아닌지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미군이 철수한 후에 월남 패망을 목격한 박정희 대통령은 월남 패망의 주요 원인을 미국의 아시아 정책의 변화로 인한 미군철수, 월남정부 각 계 각 층에 숨은 공산월맹 당원들의 반정부 활동으로 월남이 망했다고 확신하고 미군 철수에 대비한 국방력강화를 대차게 밀어 부친다, 이 때 핵무기 개발도 고려했던 것도 확실하다. 유신반대 반정부데모와 사상범에 대하여 강력하게 대처해 인권문제를 야기해서 해외에서 강한 비판을 받은 것도 이런 국내외 정치환경 속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인권 문제, 핵문제 등 미국과 마찰을 일으킨 것도 월남의 패망을 본 박정희대통령의 안보감각으로 미국과 대립한 것도 어두운 그림자가 만들어진 것도 이때였다.
10월 유신선포 후 2달여 후에 월남은 박정희대통령이 예견한 대로 공산월맹에 의해 멸망한다. 그의 국가안보를 보는 명석한 판단력이 크게 돋보인다. 1971년 4월 27일 3선으로 당선된 박정희대통령은 유신선포 당시 임기가 3년 가까이 남았는데도 10월 유신을 선포한 것을 보아도 유신은 국내외 정세와 미군철수를 시작한 미국의 아시아 정책 변화를 감지한 박정희대통령이 체제안보 강화를 위한 중대 결단이었지 자신의 장기집권을 위한 구상이 결코 아니 였다고 내가 믿는 이유가 바로 위에 언급한 당시의 년도별 국내외 정세를 분석한 결과에서 나온 것이다. 1975년 2월 월남이 패망하기 두달 전에 유신 반대가 극심해지자 박정희대통령은 자신의 신임을 묻는 국민투표를 부친다. 투표율 79.8% 찬성 73.1 % 국민은 그를 신임했다 .
군 출신으로 북한의 6.25 남침을 경험했고 미군이 한국에서 철수하면 제2의 한국전쟁이 날 것을 걱정하고 북한의 전략 전술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그는 위에 언급한 당시의 국내외 정세를 여러모로 분석하고 국가안보를 지키기 위해 고뇌에 찬 나날을 보낸 후 자신의 무덤에 침을 뱉어도 좋다며 내린 결단이라고 본다.
10월 유신은 빛과 어두운 그림자가 있다 .국방력을 크게 강화하고 국력을 신장시킨 밝은 빛이 있고 자유를 지키기 위해 일부 자유를 제한해야만 했던 어두움과 그때 희생한 사람들의 아픔도 있다. 그러나 그의 반대자들에 의해 박정희대통령의 순수하고 눈물겨운 사심 없는 나라 사랑이 어둠속에만 묻혀 버린 오늘의 세태가 너무 가슴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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